글을 만들어내는 파이프라인 만들기
글쓰기를 쉽게 만드는 효과적인 메모 시스템과 실천법 by Mansik Sohn
글쓰기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시작하기일 것입니다. 비어있는 공간은 원고지건 앱의 화면이건 막막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쨌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고개만 넘어서면 그 이후는 조금 더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하죠. 하지만 시작하는 고통을 피할수는 없습니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까요? 이번에는 글쓰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시작한 상태로 만드는 메모방법을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요약: 제텔카스텐 메모법을 활용해 글쓰기를 쉽게 만드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메모 상자 만들기
‘제텔카스텐’이란 말을 들어보았나요? 아마 메모 방법 중에는 가장 유명할 것입니다. 20세기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라는 사람이 개발한 독특한 메모 시스템으로 알려져 왔으며, 아직도 많이 회자되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다루는 책도 여럿이 있고 방법론과 원칙을 설명하는 글들, 이를 쉽게 해준다는 템플릿과 앱들도 수도 없이 많습니다. 자세한 방법에 대해서는 잘 설명한 글들이 이미 많으니 혹시 처음 접했다면 찾아보는 것을 추천드리며, 이번에는 이를 활용하여 글쓰기를 쉽게 만드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아이디어만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1. 하나의 카드에 하나의 아이디어
하나의 템플릿에 간단하게 메모합니다. 통일된 양식은 확장 가능성을 만들고, 간단함은 쉽게 작성하고 확인할 수 있게 합니다. 너무 많은 아이디어를 하나의 메모에 모아두면 다시 메모를 보았을 때 다시 이해하는 시간을 들여야 하며 아이디어간의 조합을 어렵게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메모한다’에 있습니다. 여기서 메모란 읽거나 들은 내용을 그대로 옮겨적는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언어로 재해석한 문장을 말합니다. 그래서 제텔카스텐 메모 템플릿에는 자신이 만든 문장으로 해석된 아이디어, 그 아이디어를 발견한 원본의 정보가 담기게 됩니다. 즉 이 메모는 그 자체로 글쓰기 위한 씨앗이 됩니다. 글쓰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시작한 상태로 만들어둘 수 있는 것입니다.
2. 서로 연결하기
정보는 더 많아지고 접근하기도 쉬워졌습니다. 메모하는 것은 더 쉽습니다. 하지만 이 메모더미에서 의미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하지만, 그 중 극히 일부만 필요한 순간에 찾아내 활용됩니다. 기억력과 관심사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머리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메모 자체가 서로 연결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메모를 나중에 ‘우연히’ 발견할 가능성을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3. 상향식으로 분류하기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간단하게 작성된 메모를 연결하기로 했지만 어떻게 연결해야 좋을까요? 강박적인 사람은 메모를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도서관에서 사용하는 십진분류법대로 폴더를 만들어두고 접하는 메모마다 마법모자가 기숙사를 배정하듯이 자리를 정해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지식을 분류하는 기준이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도 유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틀을 정하고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메모 자체에 이름을 붙이고 비슷한 메모가 생길 때마다 같은 이름을 붙이거나 개선합니다. 이런 분류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떤 맥락에서 이 자료를 다시 찾아보고 싶은가?” 입니다.
실천방법
도구
제텔카스텐과 같이 언급되는 앱은 Obsidian 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노션을 거쳐 다시 사용하고 있는데 제텔카스텐 방식을 위한 많은 아이디어가 반영된 앱이지만 필수적인것은 아닙니다. 기본적인 컨셉을 쉽게 실천하기 위해 템플릿과 링크 기능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도구에 너무 의존하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복사 붙여넣기 기능도 너무 강력해서 너무 많은 양의 정보가 메모에 기록된다는 것,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소화하는 과정을 건너뛰게 된다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긴 글을 보고는 언젠가는 다시 보려고 저장해 놓지만 쉽게 잊혀지고 말지요. 더 쉽게 소유할 수 있는 만큼 소화할 시간은 부족해지고 여기서 느껴지는 초조함은 더 많은 소유로 이어저 악순환이 됩니다. 한 제텔카스텐을 소개하는 글에서는 ‘메모 무덤’이라는 용어로 이 문제를 언급하는데 매우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도구에서는 최소한의 도움만 받고 수제 메모를 만들어보세요.
프로세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더하거나 변경할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글이 만들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단계가 꼭 필요합니다. 메모하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일관된 메모를 만들기
- 내 언어로 아이디어를 다시 정리하기
- 아이디어에 한개 이상의 맥락을 붙이기
- 맥락에 연결되는 아이디어를 이어 붙여 글을 조금씩 완성한다
예시
예를들어 유튜브를 보다 ‘랭쌥’이라는 요리의 레시피를 인상깊게 보았다고 해봅시다. 레시피를 어딘가 메모해두려고 하겠지요.
- 출처를 적고, 레시피를 간단히 적습니다.
- 나름대로 간단히 정리합니다. ‘피쉬소스와 라임 고수를 넣은 돼지등뼈요리를 랭쌥이라고 한다’
- 가장 중요한 맥락을 붙일 차례입니다. 도서관식 분류법이라면 #요리 #태국레시피 #돼지고기요리 같은 태그를 붙이겠지만 내게 필요한 방식으로 분류합니다. 만약 독특하게 재해석한 요리에 대한 글에 써먹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면 #익숙한_재료를_이국적으로_만들기 로 분류하고, 라임이 들어간 것에 주목한다면 #신맛으로_돼지고기를_맛있게 같은 분류를 붙일 수 있습니다.
- 만약 삼겹살과 묵은지를 같이 굽는것에 대한 메모와 연관성을 발견한다면 새로운 글이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메모(글이 만들어질 곳)에 두 메모를 붙여두고 다른 신맛에 대해 더 탐구하거나, 피쉬소스와 젓갈의 유사성에 주목해 새로운 #젓갈과돼지고기 라는 태그를 메모에 달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글을 모으다보면 책을 쓰는것도 어렵기만 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메모광으로 알려진 다산 정약용은 아들이 닭을 기른다고 편지를 쓰면, 대뜸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농서(農書) 를 찾아서 닭에 관한 내용을 옮겨 적어라. 닭을 기르면서 네가 보고 들은 내용도 빠짐없이 메모해라. 때때로 닭의 정경을 시로 묘사해 기록으로 남겨라. 그것들을 차례 지워 정리하면 훌륭한 한 권의 책이 될 것이다. 책의 이름은『계경(鷄經)』으로 붙여라”
그래도 어렵다면
+한가지 더,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참고해볼 말이 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해보세요.
“한 번도 그림을 그린 적이 없는데, 무엇부터 연습해야 할까요?”
그림 그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한 번도 그림을 그린 적이 없는 이유는, ‘기초를 확실하게 익히고 나서야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기초는 나중에 배우세요!” 기초를 연습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겁니다.
— 사이토 나오키 저/박수현 역. 잘 그리기 금지. (잉크잼), 2022